홍콩발 AK137, 새벽의 쿠알라룸푸르 벙커홈 도착기

홍콩에서 이틀을 계획대로 다 채우고, 계획대로 세 번째 나라로 향했다. 보딩패스에는 AK137, 홍콩 T2에서 쿠알라룸푸르 klia2까지, 좌석 26D라고 적혀 있었다. 6시 15분 저녁 비행기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계획대로 움직이는 여행자였다. 몇 시에 뭘 타고 어디로 갈지 다 정해둔 채로, 세 번째 나라의 첫날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 계획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저녁부터였다. MBTI J에서 P가 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AirAsia AK137 보딩패스. 홍콩 T2에서 쿠알라룸푸르 klia2까지, 좌석 26D
AirAsia AK137 보딩패스. 홍콩 T2에서 쿠알라룸푸르 klia2까지, 좌석 26D

실전 정보만 급하면 여기서 바로 내려가면 된다 — klia2에서 시내로, 심야 이동법 → · 에어아시아 홍콩~쿠알라룸푸르 노선 →. 우선은 그날 밤 이야기부터.

저가항공, 세 시간 반의 낯익음

흔히 공항에 가면 비는 시간 동안 공항을 도는 사람도 있고, 앉아서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체력이 남으면 계속 돈다. 어차피 비행기에서 잘 거니까.

게이트로 걸어가는 길에 면세점 앞을 지나다 토이스토리 완구 매대에서 발을 멈췄다. 플라잉 버즈 피규어가 줄줄이 진열돼 있었다. 딱히 살 것도 아니면서 한참을 구경했다. 비행 시간이 남아도는 여행자의 습관이었다.

탑승 전 홍콩공항 면세점의 토이스토리 완구 매대
탑승 전 홍콩공항 면세점의 토이스토리 완구 매대

게이트에 앉아 창밖을 보니 비행기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 노선은 벌써 세 번째 타는 저가항공이었다. 인천에서 홍콩까지 한 번, 홍콩 안에서 이틀, 그리고 이제 다시 하늘로. 처음엔 좌석이 좁다고 투덜댔는데 벌써 익숙해져 있었다.

게이트 유리창 너머로 늘어선 비행기들
게이트 유리창 너머로 늘어선 비행기들

자리에 앉아 셀카를 한 장 남겼다. 벌써 여행이 조금 지나가니까 긴장도 되기 시작했다. 세 나라째인데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매번 조금씩 낯설었다.

기내 좌석에서 찍은 셀카
기내 좌석에서 찍은 셀카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다. 내 인생의 첫 기내식이었다. 두근두근 뚜껑을 열었다. 흰쌀밥에 삶은 달걀 반쪽, 땅콩, 멸치볶음, 그리고 카레색으로 매콤하게 양념한 고기 한 덩이. 말레이시아 땅을 밟기도 전에 그 나라 음식부터 맛본 셈이었다. 현지식이라 그런지 입에 잘 맞았다. 이 첫 기내식을 시작으로 나는 모든 기내식이 맛있게 느껴지고(고도 때문인가?) 항상 싹싹 비워내는 습관이 생겼다. 돌이켜보면 신라면과 고추장이 슬슬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현지식이 아무리 입에 맞아도, 여행이 길어지면 결국 익숙한 매운맛을 찾게 된다.

기내식 트레이. 흰쌀밥과 카레색 고기, 멸치볶음, 삼발소스
기내식 트레이. 흰쌀밥과 카레색 고기, 멸치볶음, 삼발소스

klia2, 자정 넘어의 도착

klia2에 내리니 밤이 완전히 깊어 있었다. 터미널 안은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로 여전히 붐볐는데, 다들 어디론가 서둘러 빠져나가는 분위기였다. 머리 위로 큼직한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Pick-Up Point, Bus & Taxi, Car Rental, KLIA Ekspres. 시내로 들어가는 방법은 다 저기 적혀 있는데, 이 늦은 시간에 뭘 타야 하는지는 안내판이 알려주지 않았다.

klia2 터미널 안내판. Bus & Taxi, Car Rental, KLIA Ekspres 표시
klia2 터미널 안내판. Bus & Taxi, Car Rental, KLIA Ekspres 표시

셔틀을 타고 이동하는 내내 창밖으로 활주로 조명만 스쳐 지나갔다. 이어 어두운 지하도로 내려가 KL 모노레일 개찰구 앞에 도착했다. 이 시간엔 선풍기 한 대만 돌아가고 있었고, 벽에 붙은 노선도만 밝게 빛났다. 툰 삼반탄, 부킷빈탕, 라자 출란, 부킷 나나스. 낯선 이름들을 하나씩 읽으며 어디서 내려야 할지 가늠했다.

KL 모노레일 개찰구, 야간이라 인적이 드물다
KL 모노레일 개찰구, 야간이라 인적이 드물다

거기서 얼마쯤 더 가서는 결국 택시로 갈아탔다. 우버도 그랩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늦은 밤 낯선 도시에서 택시에 오르는 건 은근히 마음 졸이는 일이었다. 다행히 기사가 친절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운이었다. 창밖으로 노란 대형 간판과 신호등 불빛이 흐릿하게 지나갔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이라 다 번져 있는데, 그날 밤의 긴장이 그대로 담긴 것 같아 지우지 않고 남겨뒀다.

야간 택시 안에서 찍은 창밖 풍경
야간 택시 안에서 찍은 창밖 풍경

벙커홈, 그리고 새벽의 골목

숙소는 Alor Bunker Home이었다. 체크인 데스크 옆에 이용규칙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조용히 할 시간, 짐은 전날 밤 미리 싸둘 것, 방문객은 로비에서만. 맨 아래 줄에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bunkerhome86. 이 무렵엔 저렴한 도미토리 위주로 숙소를 잡고 다녔다. 방은 시원했고, 컨셉은 감옥과 던전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도미토리였다. 방 안은 대체로 조용했는데, 로비로 나오면 분위기가 달랐다. 다들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고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는, 열려 있는 곳이었다.

숙소 이용규칙 안내문.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bunkerhome86
숙소 이용규칙 안내문.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bunkerhome86

방을 배정받고 짐을 내려놓은 뒤 골목으로 다시 나왔다. 하늘이 막 밝아오는 시각이었다. 간판을 올려다보니 검은 차양에 흰 글씨로 "ALOR Bunker home — your resting hub"라고 적혀 있었고, 그 너머로 살구색 고층 콘도가 새벽빛을 받아 서 있었다. 맨발로 돌아다녀도 좋을 만큼 바닥이 시원했다. 그 돌바닥의 감촉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숙소였다. 에어컨까지 나와서 잠자리도 쾌적했다.

ALOR Bunker home 간판과 새벽빛에 물든 골목 너머 고층 콘도
ALOR Bunker home 간판과 새벽빛에 물든 골목 너머 고층 콘도

숙소 바로 옆 골목은 딴판이었다. 초록색 대형 쓰레기통 옆으로 비닐봉지가 산더미로 쌓여 있었고, 까마귀와 비둘기 몇 마리가 그 위를 쪼고 있었다. 숙소 자체는 좋았는데, 딱 하나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이 골목이었다. 예약 전 리뷰에서 숙소 앞 쓰레기 이야기를 봤는데, 설마 하고 왔더니 실제로 그래서 깜짝 놀랐다. 쓰레기는 리뷰에도 가득했다. 이것 좀 어떻게 해주세요.. 미화할 생각 없이 그대로 찍었다. 그 뒤로 숙소를 드나들 때마다 이 쓰레기 더미와 한 번씩 눈을 맞추는 게 묘한 일과가 됐다. 세계일주 66일째, 세 번째 나라의 첫인상은 깔끔한 숙소 간판과 그 바로 옆 쓰레기 더미가 함께 만든 것이었다.

새벽의 알로 스트리트 뒷골목. 쓰레기 더미와 그 위를 쪼는 새들
새벽의 알로 스트리트 뒷골목. 쓰레기 더미와 그 위를 쪼는 새들

몇 시간 뒤면 날이 완전히 밝고, 나는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숙소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덕분에, 계획대로만 움직이던 여행자가 처음으로 궤도를 벗어난다. 하지만 그건 다음 이야기다.

klia2에서 시내로, 심야 이동법

klia2는 24시간 돌아가는 공항이라 늦은 밤에 내려도 오갈 방법 자체는 있다. 가장 빠른 건 KLIA 익스프레스로, KL 센트럴까지 논스톱 약 28분이다. 심야 운행이 계속 보강되는 추세라 자정을 넘긴 시간대까지 열차가 다니는 날도 있지만, 배차 간격이 낮보다 훨씬 뜨문뜨문해서 시간표를 미리 확인하고 움직이는 게 안전하다. 좀 더 저렴하게 가려면 공항버스가 있다. KL 센트럴이나 시내 주요 지점까지 RM12 안팎, 1시간에서 1시간 반쯤 걸리는데 이 역시 심야엔 배차가 줄어든다. 그랩과 택시는 공항 밖에 정류 지점이 따로 있고 24시간 잡을 수 있지만, 늦은 밤에는 요금이 붙는 경우가 많다. 짐이 많고 늦은 시간이라면 나처럼 대중교통과 택시를 섞어 타는 것도 방법이다.

에어아시아 홍콩~쿠알라룸푸르 노선

11년이 지난 지금도 에어아시아는 홍콩과 쿠알라룸푸르 사이를 AK137이라는 같은 편명으로 잇고 있다. 홍콩 T2에서 저녁 무렵 출발해 klia2에 밤에 도착하는 스케줄도 그때와 비슷하게 유지되는 중이다. 저가항공이라 스케줄이나 요금은 시즌마다 바뀌니 출발 전에 항공사 홈페이지나 항공권 비교 사이트에서 최신 시간표를 한 번 더 확인하는 게 좋다.

다녀와서

Alor Bunker Home은 지금은 문을 닫아 더 이상 예약할 수 없는 숙소가 됐다. 그래서인지 이날 밤이 66일간의 세계일주 중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남아 있다. 계획대로 홍콩까지 다 채우고, 다음 나라로 넘어가는 밤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뿐인데, 그 하룻밤 사이에 낯선 도시의 공항과 야간 대중교통과 숙소 골목까지 한 번에 마주쳤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날 밤이 그동안의 계획적인 여행이 끝나는 지점이었다는 걸. 새벽 쓰레기 골목을 지나 방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몇 시간 뒤 내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여행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음 편은 이날 낮의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그리고 밤에 숙소에서 시작된 예상치 못한 하루다.

이 편은 세계일주 시리즈의 4편이다. 앞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홍콩 첫날부터 순서대로 볼 수 있다 — 홍콩 여행 첫날, 피크트램 타고 빅토리아피크 야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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