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 마지막 날 빅볼라멘, 그리고 쿠알라룸푸르 공항노숙 매뉴얼
말레이시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아침, 침대에 누운 채로 노트북을 펼쳐 다음 나라를 검색했다. 다음 행선지인 스리랑카 콜롬보 지도를 켜놓고 지명을 하나씩 훑어봤다. 항공권은 이미 다음 날 새벽으로 잡혀 있는데, 정작 그 나라에 대해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홍콩까지는 며칠 치 일정을 미리 짜서 움직였는데, 어느새 다음 나라를 전날 밤에야 검색하는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실전 정보가 급하면 여기부터 — 공항 노숙 명당 찾기 → · 터미널 이동과 24시간 시설 →. 우선은 페낭에서 보낸 마지막 하루부터.
숙소를 나서기 전에는 조지타운 카메라뮤지엄 입구에 들렀다. 사람만 한 곰인형이 빨간 전통 의상에 모자까지 갖춰 쓰고 앉아 있길래,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이 도시와의 마지막 인증샷치고는 제법 그럴싸했다.

빅볼라멘과 스스로 연주하는 피아노
점심은 전날 만난 친구들이 데려간 My Voice Café & Studio였다. 바얀레파스의 베이 애비뉴에 있는 이 가게는 서양식과 일본풍 라멘을 같이 파는 곳이라, 메뉴판에 치킨찹부터 빅볼라멘까지 나란히 적혀 있었다.

친구들은 그중에서도 빅볼라멘을 시켰다. 파란 꽃무늬가 그려진 커다란 사기그릇에 뽀얀 국물이 가득 담겨 나왔고, 위에는 다진 고기와 김이 얹혀 있었다. 나무젓가락 말고 국자까지 따로 줘야 할 만큼 그릇이 컸다.

한쪽에서는 커피가 나왔는데, 잔 위에 토토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 작은 라떼 한 잔에도 다들 한참을 들여다봤다. 카페 구석에는 스스로 연주하는 피아노 기계도 놓여 있어서, 밥을 먹는 내내 그 앞을 서성이며 신기해했다.

헤어짐
밥을 다 먹고 나니 헤어질 시간이었다. 이미 예약해둔 비행기가 있어서 나는 정해진 일정대로 쭉 가야 했다. 헤어질 때는 아쉬웠지만, 이 며칠을 겪고 나서야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게 진짜 재밌는 여행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까지도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으로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다.
노을 진 하늘 위로, 다시 쿠알라룸푸르
페낭에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는 길은 비행기였다. 저녁 6시가 좀 넘어 이륙한 비행기 창밖으로 오렌지빛 노을이 번졌고, 날개 아래로는 도시와 산이 깔려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바다 위로 다리 하나가 통째로 불빛을 켜고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섬과 본토를 잇는 페낭대교로 짐작되는 그 다리를, 하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쿠알라룸푸르에 내려서 신라면을 만나다
공항에 내려 출국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한쪽 벽에 커다란 배너 전시가 눈에 들어왔다. PRAY FOR SABAH — 그해 6월 사바에서 있었던 지진을 추모하는 전시였다. 산 그림 아래로 방문객들이 남긴 서명이 빼곡했다. 나도 잠깐 발을 멈추고 그 앞을 지나갔다.

다음 비행기까지 시간이 넉넉하다 못해 남아돌았다. 공항과 이어진 쇼핑몰로 들어가자 한국 마트 코너가 나왔다. 뽀로로 음료와 신라면·진라면 컵라면이 나란히 진열된 걸 보고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멈췄다. 컵라면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가져가서 뜨거운 물을 부탁했더니, 점원이 내 얼굴을 슥 보고는 대뜸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스프를 톡톡 털어 넣고 정량까지 딱 맞춰 물을 부어주는 손길이 능숙했다. 타지에서 만난 동포의 이 사소한 친절이 그날 밤 가장 따뜻한 장면으로 남았다.
라면 국물까지 비우고 나니 후식이 당겼다. 근처 스탠드에서 처음 보는 이름의 구아바 음료를 하나 시켰다. 뽀얗고 밍밍한, 배맛에 가까운 그 맛이 나쁘지 않았다. 컵을 절반쯤 비웠을 때 시계를 보니 남은 시간이 아직 열 시간 가까이였다.

자리를 여섯 번 옮기고 나서야 찾은 명당
사실 숙소비가 아까워서 이동수단 안에서 자려던 적이 이미 여러 번이었다. 그날 아침 나온 페낭의 75 Travellers Lodge도 도미토리가 하루 18링깃이었는데, 그 돈마저 아끼려면 차라리 공항에서 밤을 새우는 편이 나았다. 새벽에 잠들기 전까지는 공항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자리를 살폈다.

배를 채우고 나니 이제 진짜 잠자리를 찾을 차례였다. 충전기가 있는 자리에 바닥을 깔고 앉아봤지만 삼십 분도 못 버티고 철수했다. 쇼핑몰 한복판 벤치로 옮겨 앉아 셀카를 한 장 남겼는데, 사진 속에서는 태연한 척 웃고 있었지만 등 뒤로는 이미 허리가 뻐근해지는 중이었다.

벤치는 앉아 쉬기엔 좋아도 누워 자기엔 영 아니었다. 이 자리 저 자리로 대여섯 번은 옮겨 다닌 끝에, 새벽 4시부터 아침 세트를 파는 패스트푸드점 옆자리가 배낭을 베개 삼기에 제일 낫다는 결론에 닿았다. 5링깃 남짓한 치킨너겟 세트를 하나 시켜 2인용 좌석에 배낭을 기대 눕자, 그제야 하룻밤 잠자리가 완성됐다. 다음 목적지는 스리랑카, 길찾기도 영어도 만만치 않은 나라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지만, 이런 자리 하나 찾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밤새 버틴 보람이 있었다.
공항 노숙 명당 찾기
쿠알라룸푸르 공항은 KLIA(T1)와 klia2 두 터미널로 나뉘는데, 후자가 에어아시아 전용 터미널이라 나처럼 저가 항공을 갈아타는 배낭여행자가 몰린다.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T1이 그나마 조용하고 좌석 간격도 넓어 밤새기 편하다는 평이 많고, klia2는 상대적으로 소음이 크고 팔걸이 없는 좌석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돈을 조금 쓸 수 있다면 캡슐트랜짓에서 3·6·12시간 단위로 캡슐 침대와 샤워 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출국 심사를 거치지 않고도 묵을 수 있는 사마사마 익스프레스(위성터미널 게이트 C5 인근, 6시간 블록 RM188부터)도 있다. 예산이 더 넉넉하면 klia2 도착층에서 가까운 튠 호텔도 선택지다. 24시간 여는 식당과 편의점이 양쪽 터미널에 꽤 있고, 최근엔 klia2 P 피어(게이트 2·6 인근)에 무료 정수기도 새로 생겼다니 물병 하나 챙겨 다니면 여러모로 편하다.
터미널 이동과 24시간 시설
KLIA와 klia2는 걸어서 오갈 수 없고, 반드시 출입국·수하물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한다는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이동 수단은 세 가지다. 무료 셔틀버스가 24시간, 10분 간격으로 다니며 편도 10분쯤 걸린다(KLIA 쪽은 메인터미널 1층 4번 출구, klia2 쪽은 게이트웨이 몰 1층 A10 정류장). 가장 빠른 건 KLIA 익스프레스·트랜짓 열차로, 두 터미널 사이는 3분에 RM2다. 에어포트 라이너 버스는 RM2.50에 10분 남짓 걸리고 새벽 5시 30분부터 밤 11시 50분까지 운행한다. 시내(KL Sentral)까지 나가는 KLIA 익스프레스는 편도 RM55(온라인 구매 시 10% 할인), 왕복은 RM100이다. 최신 시간표와 요금은 KLIA 익스프레스 공식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쿠알라룸푸르 공항 기본 정보
KLIA는 1998년 문을 연 메인 터미널이고, klia2는 2014년 문을 연 저가 항공 전용 터미널이다. 두 터미널 사이 거리와 시설 배치가 매번 조금씩 바뀌니, 무료 와이파이·충전기 위치처럼 세부적인 건 도착 전 공식 공지로 한 번 더 확인해두면 헤매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다녀와서
홍콩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나는 시간표까지 짜서 움직이는 여행자였다. 나흘 만에 그 계획은 다 무너졌고, 남이 가자는 대로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공항 바닥에서 자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틀 전 페낭 숙소에서 "여기서부터는 아무데서나 자도 되겠다"고 적어뒀던 그 다짐을, 이날 밤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셈이다. 이후 90일 동안 이런 밤이 다섯 번 더 이어졌다.
라면 국물에 몸을 녹이고, 벤치에서 버티고, 결국 패스트푸드점 한구석에서 배낭을 베개 삼아 눈을 붙였던 그 밤이 지금 생각해도 은근히 애틋하다. 돈 없고 시간만 많던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방식이었던 것 같다. 다시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갈 일이 생긴다면, 이번엔 캡슐 침대 하나쯤 예약해서 좀 더 개운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 그래도 그날 밤 자리를 옮겨 다니며 웃었던 기억만큼은, 돌아가서 또 겪어보고 싶은 여행의 한 조각이다.
말레이시아에서 보낸 나흘이 이렇게 끝났다. 다음 편은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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