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보 이틀째, 사원과 페타 시장 사이에서 만난 냅킨 약도 한 장
눈을 뜨자마자 침대 위에 낯선 종잇조각 두 장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수첩을 찢어낸 종이에 이메일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구겨진 냅킨에 파란 볼펜으로 그린 약도였다. 전날 저녁 숙소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가 남기고 간 것이었다. 남쪽으로 먼저 내려간다며, 자기가 묵을 예정이라는 미리사의 숙소 이름을 냅킨에 대충 그려줬다. "Mila Rest Garden"이라는 글씨 옆으로 삐뚤빼뚤한 선 몇 개가 길과 건물을 대신하고 있었다.

실용정보만 급하면 여기서 바로 — 시마말라카 사원 정보 → · 레드 모스크 방문법 →. 아니라면 그날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다음 도시로 넘어가기 전에 숙소부터 잡아두는 여행자가 있다. 나는 그쪽이 아니었다. 이 무렵엔 이미 정해둔 계획이랄 게 거의 없었고, 다음 행선지는 대개 이렇게 누군가 흘리고 간 정보로 정해졌다. 냅킨을 접어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으면서도, 이게 며칠 뒤 실제로 나를 이끌 지도가 될 줄은 몰랐다.
짐을 챙겨 나서기 전 숙소 정문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대나무 발이 늘어진 2층 건물, 그 앞을 지키는 검은 철제 대문. 이 골목에서 며칠을 묵었는데도 매번 찾아 들어올 때마다 헤맸다.

첫 목적지는 딱히 없었다. 걷다 보니 넓은 공원이 나왔고, 잔디밭 한가운데 황금빛 불상이 연꽃 좌대 위에 앉아 있었다. 셀카 한 장을 찍고 나서야 이 공원이 어제 봤던 그 소가 있던 곳과 이어져 있다는 걸 알았다. 도시는 걸어서 돌아다닐 만한 크기였다.

사원과 모스크와 성당, 하루에 세 종교를 걸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절이라니, 이름만 듣고는 잘 그려지지 않았는데 직접 보니 정말 그랬다. 시마말라카 사원은 베이라 호수 한가운데 나무다리로 이어진 작은 섬 여러 개에 나뉘어 서 있었다. 파란 기와지붕 아래 청동 불상들이 줄지어 있고, 물빛은 초록에 가까웠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사원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뒤로 동남아 사원에 갈 때마다 신발끈부터 느슨하게 묶어두는 버릇이 이날 생겼다.


청동 불상 두 기 사이에 서서 셀카를 한 장 더 찍었다. 뒤로 콜롬보 시내 빌딩들이 물 건너 나란히 서 있는 게 보였다. 도시 한복판에 이렇게 고요한 자리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입장료를 받는 곳도 있고 안 받는 곳도 있다고 들었는데 어느 쪽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값을 치렀든 안 치렀든 아깝지 않은 풍경이었다.
다리를 건너다 우연히 마주친 장면도 있었다. 호숫가에서 한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오리 먹이 주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누가 보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오후였다. 카메라를 들었다가 방해가 될까 싶어 멀리서 한 장만 남기고 지나쳤다.

시장 골목 사이로 불쑥 붉은 줄무늬 첨탑이 솟아 있었다. 자미 울-알파르, 흔히 레드 모스크라 불리는 건물이었다. 흰색과 빨간색이 체스판처럼 겹쳐진 외벽에 양파 모양 돔이 여러 개 얹혀 있었다. 멀리서 보면 건물 자체가 무늬 있는 케이크처럼 보였다. 이슬람 사원이라 복장 규정이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고, 그날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장을 지나다 올려다본 정도로 만족했다. 시장 골목을 가로지르며 사진 한 장 남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순간이 있다.

불교 국가에서 갑자기 가톨릭 성당이 나온 것도 그날의 뜻밖이었다. 성 안토니오 성당, 콕치카데에 있는 이 성지는 종교와 상관없이 참배객이 몰리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로터리를 도는 버스와 툭툭 너머로 흰색 서양식 성당 건물이 서 있는 풍경이 낯설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불교 사원, 이슬람 사원, 가톨릭 성당을 한나절에 다 걷게 될 줄은 이날 아침까지도 몰랐다.

갈레 페이스 그린에서 시장 간식까지
바다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갈레 페이스 그린에 다다랐다는 걸 알았다. 회전교차로 한가운데 분수가 있고, 흰 사자상 네 마리가 그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인도양을 마주 보고 뻗은 산책로라 바람이 시원했는데 하늘은 이미 먹구름이 몰려오는 중이었다. 스콘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방파제 쪽으로 걸어 나가니 난간에 기대 바다를 보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들 그냥 서 있었다. 파도가 부딪혀 흰 포말로 흩어지는 걸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바닷가에서 찍은 16초 — 난간에 기대 파도를 보던 사람들
노점 앞을 서성이다가 로띠 반죽을 굽는 상인과 눈이 마주쳤다. 별무늬 티셔츠를 입고 능숙하게 반죽을 뒤집는 손놀림이었다. 옆 벤치엔 소년 하나가 앉아 무심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사진만 찍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냥 하나 사 먹을 걸 싶다.

아보카도 주스를 한 잔 마시고 나서, 근처를 좀 더 걷다가 분홍빛 스무디를 또 한 잔 시켰다. 쇼핑몰 안 Roots라는 가게였는데 왜 굳이 두 잔이나 마셨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더위 탓이었다. 영수증에는 오후 3시 41분, 아보카도 주스 250루피라고 찍혀 있었다. 그날 콜롬보 어딘가에 내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종이 한 장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셈이다.

저녁 무렵 마트에 들러 요거트와 콘플레이크, 밀로를 샀다. 다음 날부터는 며칠 이동할 계획이었으니 아침 대용으로 챙겨둘 생각이었다. 비닐봉지 안에 담긴 소박한 장바구니가 그날 하루의 마지막 사진이 됐다.

숙소로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다 아침에 넣어둔 냅킨을 다시 꺼내봤다. 삐뚤빼뚤한 선 몇 개와 지명 하나가 전부인 약도였다. 계획 없이 다니는 여행자에게 다음 목적지는 이렇게 온다. 거창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전날 밤 잠깐 스친 사람이 대신 그려준 지도 한 장으로.
시마말라카 사원
베이라 호수 위에 목조 다리로 이어진 이 사원은 09:00~16:30에 문을 연다. 입장료는 정보마다 다르다. 무료라는 이야기도 있고 300루피 안팎(인접한 강가라마야 사원 입장까지 포함)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들어갔고, 그날 이후로 이 동네에선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레드 모스크
자미 울-알파르 모스크는 방문 시간대가 정해져 있다. 오전 9시~11시 30분, 오후 1시 30분~4시 사이가 관광객 방문이 가능한 시간이고, 금요일에는 아예 닫는다. 복장 규정이 있어 남성은 긴 바지와 소매 있는 옷, 여성은 히잡과 팔다리를 가리는 옷을 갖춰야 한다. 준비하지 못했더라도 입구에서 빌려주는 옷이 있다고 하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안에 들어가려면 가이드 동행이 필요하다.
다녀와서
돌아보면 이날은 종교와 시장 사이를 오가며 걸은 하루였다. 불상, 모스크, 성당, 그리고 시끌벅적한 페타 시장까지. 서로 다른 신앙과 삶의 방식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안에 다 모여 있다는 게 콜롬보라는 도시의 인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하루의 시작엔 침대 위에 놓인 종이 두 장이 있었다. 그중 냅킨 한 장이 며칠 뒤 내가 실제로 찾아가게 될 곳을 가리키고 있을 줄은, 그때는 몰랐다.
다음 편은 이 냅킨 약도를 손에 쥐고 해안기차를 타는 이야기다. 콜롬보를 떠나 미리사로 향하는 길, 창밖으로 스치는 바다와 기차에서 만난 낯선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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