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 버스에서 만난 여섯 명, 바다 대신 에스케이프 어드벤처파크로
조지타운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은 잠도 못 잔 채로 시작됐다. 애초에 이 도시에 들어온 날부터 리듬이 꼬여 있었다. 밤을 새우고 버스를 타 이동 중에 실컷 자버렸으니 밤낮이 뒤집힌 채로 며칠을 보낸 셈이다. 그러다 전날도 늦게까지 돌아다니고 들어오니 새벽 6시가 다 됐는데, 이제 와 눕기가 아까워 손에 리치맛 캔음료 하나를 들고 그냥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 시간의 조지타운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이 여행 내내 이렇게 이른 시간에 혼자 카메라만 들고 돌아다닌 날은 손에 꼽는다.

사람 하나 없는 골목에 가로등만 켜져 있고, 벽 한쪽엔 철사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스트리트아트가 서 있었다. 소화전 옆에서 사람 형상이 물을 뿜는 모양이었는데, 낮에 봤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이 시간에 보니 묘하게 을씨년스러우면서도 멋있었다. 조지타운은 이런 골목 예술 작품이 많은 동네라던데, 낮보다 오히려 새벽에 더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골목을 벗어나기 전, 문 닫힌 약방 간판 아래로 벌써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좌판을 펴는 상인들, 리어카를 끄는 사람들. 관광객이라곤 나 하나뿐인 그 골목에서 도시가 눈뜨는 걸 처음부터 지켜본 셈이었다.

큰길로 나오니 카피탄 클링 모스크가 나왔다. 검은 돔과 흰 첨탑이 새벽빛을 받아 조용히 서 있었다. 조지타운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라던데, 이 시간엔 지나가는 차 몇 대 말고는 온전히 내 차지였다. 사람 붐비는 낮 시간에 왔으면 사진 한 장 찍기도 번거로웠을 텐데, 새벽에 혼자 걸은 덕분에 건물을 이렇게 오래 올려다볼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Ray와 Seth가 아침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둘 다 뉴질랜드에서 온 친구들로, 페낭 숙소 75 Travellers Lodge에서 만나 며칠째 어울리고 있었다. 동네 딤섬집에 들어가니 카트가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만두며 포자며 접시에 담긴 것들을 보여줬다. 손짓으로 카트에서 골라 담는 방식이 신기해서 이것저것 집었다.

찐빵을 반으로 가르니 김이 올라왔다. 셋이서 젓가락으로 이것저것 나눠 먹으며 차를 마셨는데, 별다른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너무 재밌었다. 외국 친구랑 아침 하나 같이 먹는 게 뭐라고, 그게 그렇게 신기하고 좋았다.
원래는 바다를 보러 가는 버스였다
아침을 먹고 원래 계획은 바다를 보러 가는 거였다. 페낭 북쪽 어디쯤 바다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정류장에 붙은 노선표를 한참 들여다봤다. 101, 102, 103번 노선이 각각 웰드 부두와 공항, 그리고 북쪽 텔록 바항 방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낡아서 글자가 잘 안 보이는 안내판을 한참 붙들고 서 있다가 겨우 버스를 탔다.

사실 먼저 말을 건 쪽은 나였다. 이 나라 로컬 버스는 며칠을 타고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서, 확신이 안 설 때마다 옆 사람에게 영어 되냐고 묻고 이 버스가 맞는지 확인하는 게 습관이 돼 있었다. 이날도 그랬다. 노선을 물어보려고 말을 걸었을 뿐인데, 그러다 같은 버스에 오르게 됐고, 그 다음부터는 일이 알아서 굴러갔다.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데 아까 그 친구들이 이번엔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가지런히 자른 친구와 그 옆의 친구였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고, 이 버스에 함께 탄 다른 친구들까지 여섯 명이 다 같이 놀러 가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됐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이인데 그날이 마침 다 같이 쉬는 날이라고 했다.

내가 바다를 보러 간다고 하니, 자기네도 오늘 쉬는 날이라 놀이동산 같은 델 간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고민은 거의 안 했다. 워낙 친근하게 권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그러겠다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따라가도 되나 하는 계산 같은 건 들어설 틈도 없었다.
버스 안에서 다른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다들 런닝맨 같은 한국 예능을 안다면서 신기해했다. 나이는 정확히 모르지만 다들 나보다 어렸을 것 같다. 내 나이를 듣고 놀란 눈치였으니까.
영어가 다 통한 것도 아니었다. 내 영어도 형편없었고 친구들도 그랬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재밌었다. 단어 몇 개를 던지고 손짓을 보태고, 그러다 뜻이 통하면 다 같이 웃었다. 말이 완벽하게 통하는 대화보다 이쪽이 훨씬 즐거울 수 있다는 걸 그날 알았다.

바다는 못 봤지만, ESCAPE Adventureplay
버스가 도착한 곳은 ESCAPE Adventureplay라는 어드벤처파크였다. 매표소 위로 파크맵이 붙어 있었는데, 로프코스며 짚라인이며 이름도 낯선 시설들이 빼곡했다.

입장료를 누가 냈는지는 솔직히 기억이 안 난다. 그날 이것저것 얻어먹은 게 워낙 많아서 이것도 친구들이 계산했을 가능성이 크다. 내 성격상 내겠다고 지갑은 꺼냈을 텐데, 그 손이 받아들여졌는지까지는 남아 있지 않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식이었다.
높이 매달린 그물다리와 로프코스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때 한국에는 이런 시설이 거의 없었다. 놀이기구에 앉아서 실려 다니는 게 아니라, 밧줄 하나에 몸을 묶고 자기 힘으로 건너가는 방식이라 놀이동산이라기보다 군대 유격훈련장에 가까웠다. 그게 신기해서 계속 두리번거렸다.
안전벨트를 채우고 첫 발을 내딛는 순간엔 발밑이 흔들려 손잡이를 꽉 쥐었는데, 몇 발 건너고 나니 금방 감이 왔다. 생각보다 꽤 능숙하게 해냈다. 친구들 중 한 명이 나랑 죽이 잘 맞아서,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코스를 빠르게 통과했다. 밑을 내려다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친구들 목소리에 나도 같이 웃었다. 내려와서는 다 같이 숨을 몰아쉬며 서로 잘했다고 등을 두드려줬다.
코스를 마치고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일곱 명이 나란히 서서, 뒤로는 방금 건너온 로프코스가 보이는 자리였다. 처음 본 사람들이랑 이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진까지 찍을 줄은 그날 아침까지도 몰랐다.

결국 그날 바다는 못 봤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파도 소리나 듣고 왔을 텐데, 대신 낯선 사람들과 하루 종일 로프에 매달리고 사진을 찍고 웃었다. 바다보다 훨씬 남는 하루가 됐다.

이 친구들 중에서도 유독 나를 잘 챙겨준 사람이 있었다. 별명이 엘리스였다. 한국 아이돌과 케이팝을 비롯해 한국 문화 전반을 좋아해서, 내가 하는 사소한 말 하나하나에도 신나 했다.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crazy korea girl"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다. 뭘 물어봐도 두근두근한 표정으로 답하는 게 보여서, 나도 덩달아 아는 이야기를 더 많이 꺼내게 됐다.
주변 친구들도 그 분위기를 알아채고는 하루 종일 둘을 붙여놓으려고 밀어줬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옆에 세우고, 뭔가 고를 일이 있으면 둘이 같이 가라고 하고. 그런 장난이 밉지 않고 재밌었다. 다만 내가 페낭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뭘 더 해보기에는 처음부터 시간이 없었던 셈이고, 지금은 인스타그램 친구로 가끔 소식만 주고받는다. 그래도 낯선 나라에서 이렇게까지 잘 대해주는 사람을 만난 하루였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이날이 이 여행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지점이었다. 홍콩까지는 계획대로만 움직였는데, 말레이시아에 와서는 자꾸 남이 가자는 데로 따라가게 됐다. 그런데 그게 훨씬 재밌었다. 호의를 받으면서 친구가 되는 과정이 계획해서 짠 일정보다 몇 배는 즐거웠고, 나도 뭐라도 갚고 싶어서 말을 더 걸고 웃고 그랬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렇게 하루를 통째로 보낼 수 있다는 걸, 이날 처음 알았다.
저녁엔 이 친구들이 데려간 백화점과 야시장 이야기가 더 남아 있는데, 그건 다음 편에 마저 쓴다.
ESCAPE Adventureplay 가는 법
ESCAPE Adventureplay는 조지타운에서 북쪽으로 20km쯤 떨어진 Teluk Bahang에 있다(828 Jalan Teluk Bahang, 11050 Penang). 조지타운 웰드 부두(Weld Quay)에서 Rapid Penang 101번 버스를 타면 바투페링기를 지나 한 시간 안팎으로 도착한다. 배차는 낮 시간대 10분 간격으로 촘촘한 편이고, 첫차는 새벽 5시 반, 막차는 자정 근처까지 있다. 파크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고, 입장료는 2026년 기준 성인 RM189, 어린이 RM129 선이다(예매처마다 다르니 방문 전 확인). 내가 갔을 땐 RM72였으니 그새 요금이 꽤 올랐다.
다녀와서
그날 아침 버스에 오를 때만 해도 바다를 볼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옆자리 친구 몇 마디에 계획이 통째로 바뀌었고, 결과적으로 바다 대신 사람을 얻었다. 지금도 이 친구들과는 SNS로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다. 계획을 버리고 얻은 것치고는 꽤 남는 장사였다.
다음 편은 이날 저녁, 백화점과 야시장에서 뱀을 목에 걸어본 이야기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