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없는 75 트래블러스 로지, 그래도 잘 잤던 페낭 첫날 밤

조지타운 벽화 골목을 오후 내내 걸었더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숙소를 찾아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니 초록 간판에 하얀 글씨로 "75 Travellers Lodge"라고 적혀 있었다. 도미토리 하루 RM18, 에어컨은 없고 천장 선풍기만 돌아가는 곳이었다. 사실 잘 모르고 들어갔다. 가격만 보고 골랐지 에어컨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도 안 했다. 체크인을 하고 나서야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를 보고 살짝 걱정이 됐다. 7월의 페낭에서, 선풍기 하나로 밤을 날 수 있을까.

해질녘 골목 끝에 걸린 75 Travellers Lodge 간판
해질녘 골목 끝에 걸린 75 Travellers Lodge 간판

방을 배정받고 짐을 내려놓는데 같은 도미토리에 묵던 뉴질랜드 친구 둘과 마주쳤다. 레이와 세스였다. 더워서 웃옷도 안 입은 채로 인사를 나눴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뜨끈한 차와 딤섬을 시켰는데, 그 더위에 뜨거운 걸 먹으니 오히려 기분이 확 좋아졌다. 계산은 각자 했다. 둘 다 성격이 쿨했고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잘생겼었다. 서양 친구들은 정말 잘생겼구나, 그 생각을 이날 처음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외국인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영어도 말하기는 지금도 잘 못한다. 그나마 듣기가 되는 건 고등학교 때 《프렌즈》에 빠져서 몇 번씩 돌려본 덕이다. 그런데 막상 낯선 사람들 사이에 던져지니 먼저 말을 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 성격이 이 정도로 외향적인 줄은 이 여행 전까지 몰랐다.

모기는 많고 에어컨은 없고 덥긴 한데, 그게 오히려 낭만처럼 느껴졌다. 밥을 먹고는 각자 흩어져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숙소 근처 므운트리 스트리트부터 걸었다. 초입에 붉은 등이 걸린 사당이 있었다. 천후궁, 화교 이민자들이 모시던 바다의 여신을 기리는 곳이라고 했다. 지붕 위 용 조각이 조명을 받아 번쩍였다.

므운트리 스트리트 초입, 야간 조명을 받은 천후궁 정문
므운트리 스트리트 초입, 야간 조명을 받은 천후궁 정문

조금 더 걸으니 벽에 철사로 그린 벽화 두 개가 나왔다. 하나는 주석 상인 둘이 인사를 나누는 장면에 "Hello Orang Kaya! Hello Tauke!"라는 말풍선이 달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이 골목에서 유명 슈즈 디자이너 지미 추가 견습생으로 일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벽화 앞에서 셀카를 남겼다.

므운트리 스트리트의 와이어프레임 벽화. 주석 상인들의 인사말이 적혀 있다
므운트리 스트리트의 와이어프레임 벽화. 주석 상인들의 인사말이 적혀 있다
지미 추의 견습 시절 이야기를 담은 벽화 앞에서 찍은 셀카
지미 추의 견습 시절 이야기를 담은 벽화 앞에서 찍은 셀카

시청 쪽으로 걷다 보니 골목 위로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Selamat Datang Bazar Ramadhan — Liga Muslim Pulau Pinang." 라마단 바자였다. 2015년 7월 초는 라마단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시기라 해만 지면 이 일대가 살아났다. 큰 솥 여러 개가 나란히 걸리고, 로티 반죽을 굽는 철판에서 김이 올라왔다.

그래놓고도 정작 나는 라마단을 체감하지 못했다. 여행자 입장에선 먹는 데 아무 제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때나 배고프면 사 먹을 수 있었고, 문 닫은 식당 때문에 곤란한 적도 없었다. 현수막과 노점 풍경이 아니었다면 그냥 밤에 활기찬 동네구나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Selamat Datang Bazar Ramadhan 대형 현수막이 걸린 야시장 입구
Selamat Datang Bazar Ramadhan 대형 현수막이 걸린 야시장 입구
라마단 바자 노점, 커다란 스테인리스 솥과 로티 반죽을 굽는 철판
라마단 바자 노점, 커다란 스테인리스 솥과 로티 반죽을 굽는 철판

나시깐다르 식당 간판에는 "Ramadhan Special Set"이라고 적힌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하루 종일 금식하고 해 진 뒤 한 끼를 몰아 먹는 라마단 특유의 리듬이, 밤이 되면 오히려 거리를 북적이게 만드는 게 신기했다.

Restoran Kapitan 야간 간판, 라마단 특선 세트 메뉴판이 붙어 있다
Restoran Kapitan 야간 간판, 라마단 특선 세트 메뉴판이 붙어 있다

하얀 시계탑이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곳을 지나 Red Garden Food Paradise로 들어갔다. 포도넝쿨 지붕 아래 홍등이 걸린 야외 푸드코트였는데, 라마단 바자와 달리 이쪽은 맥주를 마시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같은 밤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야시장을 연달아 본 셈이다. 진한 갈색 커리 한 그릇을 시켰다. 감자와 오크라가 듬뿍 들어가 있었다.

오크라를 먹어본 게 이때가 처음이었다. 잘라놓은 단면이 별 모양인 것도, 씹으면 끈적한 즙이 나오는 것도 낯설었다. 모르는 재료가 들어 있어도 일단 시켜서 다 먹어보자는 게 그때 내 원칙이었다. 요즘은 일본을 자주 다니면서 오크라를 아무렇지 않게 집어 먹는데, 그 첫 만남이 페낭의 이 커리 한 그릇이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야간 조명을 받은 조지타운 시계탑
야간 조명을 받은 조지타운 시계탑
포도넝쿨 지붕 아래 손님으로 붐비는 Red Garden Food Paradise
포도넝쿨 지붕 아래 손님으로 붐비는 Red Garden Food Paradise
감자와 오크라가 들어간 진한 커리 한 그릇
감자와 오크라가 들어간 진한 커리 한 그릇

솔직히 심심하기도 했다. 전날 밤만 해도 처음 보는 사람들 차를 얻어 타고 왁자지껄하게 놀았는데, 이날은 혼자였다. 그래서 계속 걸었다. 길에서 코코넛을 통째로 잘라 빨대를 꽂아주는 걸 사서 들고 다니며 마셨다.

배를 채우고도 발길이 바다 쪽으로 향했다. 밤바다를 따라 걸으면서 별생각을 다 했다. 다만 아주 살짝, 누가 말을 걸어오면 어쩌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낮이었으면 반가웠을 텐데 밤이라 그랬다. 해안에 인접한 호커센터는 가로등이 늘어선 야외 좌석에 가족 단위 손님들로 붐볐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Fort Cornwallis 정문이었다. 야간 조명 아래 "Fort Cornwallis"라는 네온 글씨가 떠 있었고, 그 옆 에스플러네이드 잔디밭엔 야자수 실루엣만 조용히 서 있었다.

해안 인접 호커센터, 가로등 아래 가족 단위 손님들로 붐비는 야외 좌석
해안 인접 호커센터, 가로등 아래 가족 단위 손님들로 붐비는 야외 좌석
야간 조명을 받은 Fort Cornwallis 정문
야간 조명을 받은 Fort Cornwallis 정문

숙소로 돌아와 선풍기 아래 누웠다. 에어컨도 없고 모기도 있었는데, 걱정과 달리 한 번도 안 깨고 잘 잤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기적이다. 그러면서도 다음 숙소는 꼭 에어컨 있는 데로 잡아야겠다고 다짐은 했다.

그날 일기 한구석에는 이렇게 적었다. "여기서부터 아무데서나 자도 되겠다 생각." 별생각 없이 남긴 한 줄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이 여행의 방향을 바꾼 문장이었다.

그땐 몸이 진짜 건강했다. 어디에 눕든 잠이 들고, 뭘 먹든 탈이 안 났다. 마인드도 원래 야생이었다는 걸 이 여행에서 알았다. 이틀 뒤 첫 노숙을 시작으로 남은 여정 동안 여섯 번을 더 그렇게 잤는데, 지금의 나는 절대 못 할 일이다.

조지타운 저가 숙소 사정 2026

75 Travellers Lodge는 지금은 문을 닫았다. 므운트리 거리 특유의 낡은 상점집을 개조한 20실짜리 작은 곳이었는데, 팬 냉방 10인 도미토리를 60링깃 아래 가격에 운영하던 올드스쿨 배낭여행자 숙소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 조지타운에서 비슷한 자리를 찾는다면, 도미토리 침대 하나에 대략 15~35링깃(약 4~9달러) 선이 평균이고, 에어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가격 차이가 꽤 난다. 출라 거리·러브 레인·므운트리 거리 일대에 이런 저가 숙소가 여전히 몰려 있어서, 예산이 빠듯하면 검색 필터에서 팬룸으로만 좁혀보면 선택지가 늘어난다.

라마단 시즌 페낭 여행 팁

라마단은 이슬람력을 따르기 때문에 해마다 시기가 달라진다. 2026년 라마단은 2월 17일에 시작해 3월 21일 하리라야로 끝난다. 이 기간 조지타운 곳곳에 바자 라마단이 서는데, 잘란 페낭이나 프랑인 몰 인근처럼 매년 조금씩 자리가 바뀌니 방문 시기에 맞춰 현지 SNS나 관광안내소에서 위치를 확인하는 게 좋다. 대체로 오후 3~4시께 열려 해가 진 뒤 절정을 이루고 밤 8시 전후로 정리되는 흐름이라, 늦은 오후에 도착하면 로티나 커랩(꼬치) 같은 노점 음식이 가장 다양하게 나와 있을 때를 만날 수 있다.

다녀와서

에어컨도 없고 모기도 있는 방에서 그렇게 편히 잔 밤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돌이켜보면 불편함이 낭만으로 바뀌던 순간이 딱 이 밤이었던 것 같다. 계획대로 움직이던 여행이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날부터였다.

다음 편은 페낭 바다를 보러 탄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여섯 명의 이야기다. 원래는 바다만 보고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그 만남이 이 여행에서 가장 크게 방향을 튼 하루가 됐다.

이 편은 2015 세계일주 시리즈의 8편이다. 앞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홍콩 첫날부터 순서대로 볼 수 있다 — 홍콩 여행 첫날, 피크트램 타고 빅토리아피크 야경까지.

시리즈 이어 읽기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90일간의 세계여행 - 배낭 메고 23개국

홍콩 여행 첫날, 피크트램 타고 빅토리아피크 야경까지

홍콩 여행 둘째 날,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와 심포니 오브 라이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