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에서 흩어진 뒤, 테베레 강을 따라 혼자 걸었다

아침에 여덟 명으로 출발한 하루가 오후에는 한 명이 됐다. 그런데 그 오후가 그날에서 제일 좋았다.

바쁘면 실전 정보부터 — 테베레 강변 산책 코스 → · 로마 슈퍼마켓 활용법 →. 우선은 혼자가 된 뒤의 이야기부터.

여덟이 하나가 되는 데 오 분

성 베드로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올려다본 모습

바티칸 관람이 끝나갈 무렵 일행이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누구는 박물관에 더 남고, 누구는 컨디션이 안 좋아 숙소로 돌아갔다.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 광장 오벨리스크 아래에서 몇 마디 하다가 각자 방향이 달라졌고, 그게 끝이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헤어지는 방식은 대개 이렇게 흐지부지하다.

혼자가 되고 나니 걸음이 편해졌다. 아침 내내 영어 대화를 반쯤 알아듣느라 머리가 피곤했는데, 그게 갑자기 사라졌다. 어디로 갈지도 내가 정하면 됐다.

원통형 무덤이 요새가 되고 감옥이 됐다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카스텔 산탄젤로의 성벽
카스텔 산탄젤로 — 무덤에서 요새로, 다시 감옥으로 쓰였다

광장에서 강 쪽으로 직진하면 커다란 원통형 건물이 나온다. 카스텔 산탄젤로다.

원래는 황제의 무덤으로 지어졌다고 했다. 그러다 성벽이 붙고 요새가 됐고, 교황이 위험할 때 바티칸에서 이리로 피신하는 비밀 통로까지 생겼다. 나중에는 감옥으로도 썼다. 건물 하나가 천 팔백 년 동안 용도를 네 번쯤 바꾼 셈이다.

해자 자리에는 지금 잔디와 나무가 심겨 있다. 벽돌 성벽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데, 그 곡선 바깥으로 다시 별 모양 외벽이 한 겹 더 있다. 아래에서 보면 두 겹이 겹쳐 보여서 구조가 잘 안 잡힌다.

카스텔 산탄젤로 성벽 앞에서 남긴 셀카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은 이미 오전에 줄을 한 시간 넘게 서봤던 터라, 또 표를 사고 또 줄을 설 생각이 없었다.

강변으로 내려가면 사람이 없다

테베레 강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강둑 아래로 내려가면 도시 소리가 확 줄어든다

성을 지나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강둑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강 양쪽 둑이 높아서, 내려가면 도시 소리가 확 줄어든다. 위에서는 차 소리와 사람 소리가 계속 나는데, 몇 계단만 내려가면 그게 다 위로 올라가 버린다. 폭이 넓은 산책로가 강을 따라 계속 이어졌고,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테베레 강변 산책로에서 남긴 셀카

강물은 초록에 가까운 흙빛이었다. 로마의 강이 이렇게 탁할 줄은 몰랐는데, 알고 보니 원래 그렇다고 한다. 강 이름 자체가 그 흙빛에서 왔다는 얘기도 있다.

초록빛을 띤 테베레 강물과 강변의 가로수

강 건너편으로는 큼직한 관공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리석에 조각을 잔뜩 붙인 건물이 특히 눈에 띄었다.

강 건너편의 커다란 벽돌색 관공서 건물

로마 사람들이 못생겼다고 부르는 건물

조각으로 뒤덮인 로마 대법원 건물 정면
로마 대법원 — 현지에서는 "못생긴 재판소"로 불린다

그 건물이 대법원이었다.

조각이 너무 많아서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는 건물이었다. 기둥과 조각상과 부조가 벽면을 빈틈없이 덮고 있고, 옥상에는 청동 사두마차까지 올라가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로마 사람들은 이 건물에 "못생긴 재판소"라는 별명을 붙여놨다고 한다. 짓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고, 그냥 과하다는 말도 있다.

대법원 건물 앞에서 남긴 셀카

나는 오히려 재미있었다. 이 도시에서 본 대부분의 건물은 절제돼 있었는데, 여기만 유독 다 쏟아부었다. 백 년 조금 넘은 건물이라 로마 기준으로는 아주 새것인데, 새것이 옛것보다 더 옛날처럼 보이려고 애쓴 인상이었다.

다리 한가운데 서면 아까 나온 그 돔이 강 끝에 걸린다. 강줄기가 곧고 양옆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어서, 그 사이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정확히 가운데에 놓인다. 아침에 그 안에 서 있다가 오후에 멀리서 다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강 너머로 성 베드로 대성당 돔이 보이는 자리에서 남긴 셀카
다리 한가운데 서면 강 끝에 성 베드로 대성당 돔이 걸린다

같은 자리에서 몇 장을 더 찍었다. 자판기에서 콜라를 하나 뽑았다. 그늘이 없어서 캔이 금방 미지근해졌다.

다리 난간에 기대 강을 배경으로 남긴 셀카
손에 든 콜라 캔

슈퍼마켓에서 로마 물가를 다시 봤다

슈퍼마켓 냉장 진열대에 놓인 햄과 가격표
슬라이스 햄 한 팩이 1유로가 안 됐다

저녁 무렵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동네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그냥 시원해서 들어간 건데, 진열대를 보다가 발이 묶였다.

냉장 진열대의 얇게 썬 햄이 한 팩에 0.89유로였다. 옆에는 0.49유로짜리 행사 상품도 있었다. 며칠 전 점심 한 끼에 만 삼천 원을 쓰고 계산기를 두드리던 게 바로 이 도시였다.

선반 하나가 통째로 헤이즐넛 스프레드였다. 한국에서는 작은 병으로만 보던 게 여기서는 들고 다니기 힘든 크기로 쌓여 있었다. 값은 크기에 비하면 놀랄 만큼 쌌다.

슈퍼마켓 선반에 쌓인 대용량 스프레드와 통조림

그날 아무것도 안 샀다. 다음 날 아침에 먹을 걸 좀 사둘까 하다가, 숙소에 냉장고가 마땅치 않아서 접었다. 지금 같으면 무조건 샀을 것이다.

로마가 비싸다는 말은 반만 맞다. 관광지 근처에서 앉아서 먹으면 비싸고, 슈퍼에서 사서 공원에서 먹으면 소피아와 큰 차이가 없다. 이걸 로마에 도착한 첫날 알았으면 며칠이 훨씬 여유로웠을 것이다.

테베레 강변 산책 코스

로마에서 사람에 치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구간이다.

  • 강둑 아래 산책로(룽고테베레)로 내려간다. 계단이 다리 근처마다 있다. 위쪽 도로는 차가 많고 시끄럽지만 아래는 조용하다.
  • 추천 구간은 카스텔 산탄젤로 → 산탄젤로 다리 → 대법원 앞 → 카부르 다리다. 30분이면 걷는다.
  • 다리 위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 돔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는 산탄젤로 다리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다리 두 곳이다. 해 질 무렵 빛이 좋다.
  • 여름에는 강변에 야시장 형태의 노점과 간이 바가 들어선다. 저녁에 걸으면 낮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 된다.
  • 그늘이 거의 없다. 한낮에는 피하고, 물을 챙기는 게 좋다. 로마 시내 곳곳의 나소네(작은 공공 수도)에서 물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카스텔 산탄젤로 안에 들어간다면 성인 요금이 붙는다. 옥상 테라스에서 보는 전망이 좋다는 평이 많은데, 밖에서 강변만 걸어도 충분히 값어치를 한다.

로마 슈퍼마켓 활용법

식비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주요 체인은 Conad, Carrefour Express, Coop, Todis, Pam이다. 관광지 한복판의 미니마켓은 같은 물건이 두 배쯤 하니, 한 블록만 벗어나서 큰 매장을 찾는 게 낫다.
  • 대략의 시세: 생수 1.5L 0.3~0.5유로, 파스타 한 봉 1유로 안팎, 슬라이스 햄 한 팩 1~2유로, 치즈 2~4유로, 하우스 와인 한 병 3~5유로.
  • 영업은 보통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 일요일에는 단축 영업하거나 닫는 매장이 있다. 일요일 저녁에 굶지 않으려면 토요일에 사두는 편이 안전하다.
  • 과일·채소는 저울에 올려 직접 라벨을 뽑아야 계산대에서 통과된다. 이걸 모르면 줄 서 있다가 되돌아가게 된다.
  • 봉투는 유료다. 접이식 장바구니가 있으면 여행 내내 쓴다.

로마 시내 공원과 광장 계단은 대부분 앉아서 먹어도 되지만, 스페인 계단처럼 금지된 곳이 있으니 안내판을 한 번 보는 게 좋다.

다녀와서

여럿이 다니는 여행이 나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날은 흩어지고 나서야 내 속도가 나왔다.

강변을 혼자 걷고, 아무도 없는 산책로에서 물소리를 듣고, 슈퍼마켓 진열대를 구경하다 나온 오후. 유명한 곳은 하나도 안 들어갔는데 그날 기억은 이쪽이 더 진하다. 다시 로마에 가면 이 강변 구간부터 걸을 것 같다.

다음 편은 그날 밤이다. 낮에 스쳐 간 곳들을 밤에 다시 걸었더니 도시가 통째로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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