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해안기차를 타고 미리사까지, 표지판 열네 개 앞에서 고른 숙소

냅킨 약도를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아침 일찍 콜롬보 포트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기차를 타고 남쪽 해안을 따라 미리사까지 내려가는 날이었다. 표를 끊고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그냥 이동하는 하루라고만 생각했다. 몇 시간 뒤엔 이날이 이 여행에서 손꼽히게 낭만적인 하루로 남을 줄은 몰랐다.

실용정보만 급하면 여기서 바로 — 콜롬보→미리사 해안기차 예약법 → · 미리사 숙소 시세 →. 아니라면 그날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기차가 콜롬보 시내를 벗어나자 창밖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선로가 해안선에 거의 붙어서 달리는 구간이 이어졌고,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이 인도양이었다. 손을 뻗으면 파도에 닿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파도에 닿을 것 같았던 해안 철길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파도에 닿을 것 같았던 해안 철길

사진으로는 이 구간의 소리가 안 담긴다. 그날 창밖에 대고 찍어둔 영상을 붙여둔다.

달리는 열차 창밖으로 바로 옆이 인도양이다

예쁘지 않은 바다인데 낭만이 있었다

바다는 사실 그렇게 예쁜 색은 아니었다. 하늘은 흐렸고 물빛도 짙은 회색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이 구간이 낭만적으로 남은 건 풍경보다 열차라는 형식 자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달리는 칸이 많았고, 몇몇 승객은 문가에 걸터앉아 다리를 밖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안전 규정에 익숙한 나라에서 온 여행자에게는 이 열린 문 자체가 낯선 자유처럼 느껴졌다. 정차한 틈에 뛰어내렸다가 다시 올라타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위험한 구조였다. 위험해서 오히려 낭만적이었다.

선로가 해안선에 붙어 달리는 구간

자리 맞은편엔 스리랑카 대학생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영어로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어느새 공부하는 것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눈빛이 유난히 초롱초롱했다. 확실한 꿈을 가진 사람 특유의 눈빛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낯선 사람과 세 시간 넘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 것도 이 여행에서 처음이었다. 아쉽게도 카메라를 꺼낼 타이밍을 놓쳐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그 눈빛은 지금도 또렷하다.

미리사 도착, 표지판 열네 개 앞에서 고른 숙소

세 시간 남짓 달려 미리사에 내렸다. 역에서 몇 걸음 걸으니 바로 바다가 보였다. 초승달 모양 백사장 끝에 작은 바위섬 하나가 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밀물만 아니면 걸어서 건너갈 수 있는 패럿록이었다.

미리사에 도착해 처음 마주한 해변, 끝자락에 패럿록이 보인다
미리사에 도착해 처음 마주한 해변, 끝자락에 패럿록이 보인다
걸어서 건너갈 수 있는 패럿록으로 향하는 사람들
걸어서 건너갈 수 있는 패럿록으로 향하는 사람들

바위 위에 올라서면 양쪽으로 해변이 갈린다

짐을 넣어둘 곳부터 찾아야 했다. 미리 예약해둔 숙소는 없었다. 해변에서 골목 하나로 꺾어 들어가니 파란 화살표 표지판이 나무 울타리처럼 줄줄이 박혀 있었다. 맨 위 "UDUPILA - MIRISSA, 2nd Cross Road" 아래로 숙소 이름만 열네 개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RANDIYA SEA VIEW INN, OCEAN REACH HOTEL, LION HOUSE, SHEHAN GUEST HOUSE. 읽다 보면 어디가 어딘지 헷갈린다.

2nd Cross Road 초입,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화살표로 줄줄이 박힌 표지판
2nd Cross Road 초입,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화살표로 줄줄이 박힌 표지판

누군가는 이런 표지판 앞에서 제일 가까운 곳을 그냥 고른다. 나는 그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결국 몇 군데를 실제로 걸어가 방을 들여다보고서야 정할 수 있었다. 그중 한 곳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주황색 철제 이층침대에 남의 짐이 널려 있는 도미토리였다.

숙소를 보러 다니며 들여다본 도미토리, 주황색 철제 이층침대

*방을 보러 다니며 찍은 도미토리 한 곳* 표지판 목록에는 이름도 없던 행오버 호스텔이었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신축 건물이었다. 입구엔 칠판에 분필로 "Air Con & Hot Showers, Rooms, Dorms"라고 적어둔 안내판이 서 있었다. 가격은 그날 둘러본 곳 중 제일 저렴한 축이었고, 에어컨이 되는 방이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공사 중이던 행오버 호스텔 입구의 분필 칠판
길가에 세워둔 칠판 — Air Con & Hot Showers, Rooms, Dorms. 뒤로 공사 자재가 쌓여 있다

숙소 건물은 원목으로 새로 지은 이층집이었다. 초록색 벽에 주황색 계단을 칠해뒀고, 마당엔 서핑보드가 세워져 있었다.

원목으로 새로 지은 행오버 호스텔 건물, 초록 벽에 주황 계단
원목으로 새로 지은 호스텔 건물 — 초록 벽에 주황 계단

체크인을 받아준 건 이탈리아인 남자와 현지인 여자 매니저였다. 공사가 채 끝나지 않은 숙소를 이렇게 먼저 열어젖힌 게 신기했다. 둘 다 야망이 있어 보였다. 손님 받을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문을 열고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쪽을 택한 사람들 같았다. 공사 자재가 쌓인 마당을 가로질러 방으로 가야 했다. 그 정도는 시원한 에어컨 한 대로 다 상쇄됐다.

밤이 되어 조명이 켜진 호스텔 마당, 나무로 지은 신축 건물
밤이 되어 조명이 켜진 호스텔 마당, 나무로 지은 신축 건물

첫 저녁 — 코코넛, 해산물, 촛불, 그리고 콜라 한 잔

짐을 풀고 나서 근처 로드사이드 식당에서 늦은 첫 끼니를 먹었다. 야채를 잘게 썰어 볶은 밥에 룬미리스라는 고추 삼발이 한 숟갈 얹혀 나왔다. 삼발을 밥에 섞을수록 매워진다. 그 매운맛이 더위에 늘어진 입맛을 되돌려놨다. 곁들여 나온 건 생과일을 그대로 간 주스였다.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아까 그 게스트하우스 표지판이 그대로 보였다.

야채 볶음밥에 룬미리스 삼발과 생과일 주스
볶음밥과 생과일 주스 — 뒤로 아까 그 표지판이 보인다
볶음밥에 룬미리스 삼발을 섞어 먹는 중
붉은 삼발을 섞을수록 매워진다

짐을 풀고 나와 해변을 따라 걸었다. 노점 하나에서 남자가 마체테로 킹코코넛을 손질하고 있었다. 붉은 조명 아래서 몇 번 내려치니 뚜껑이 열렸고, 빨대를 꽂아 바로 건네줬다.

붉은 조명 아래 마체테로 킹코코넛을 손질하는 손
붉은 조명 아래, 마체테가 몇 번 내려간다
빨대를 꽂아 건네받은 킹코코넛
뚜껑이 열리자마자 빨대가 꽂혀 나왔다

조금 더 걸으니 은색 쟁반 위에 생선과 새우, 게가 종류별로 진열된 좌판이 나왔다. 직접 골라 그 자리에서 구워주는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저녁 메뉴를 눈으로 먼저 고르는 것도 처음이었다.

종류별로 진열된 생선·새우·게, 골라서 바로 구워주는 해변 좌판
종류별로 진열된 생선·새우·게, 골라서 바로 구워주는 해변 좌판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는 백사장에 초를 켜놓은 레스토랑 테이블들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 야자수 그림자 사이로 촛불이 흔들리는 걸 보고 있으니, 여행 잡지 사진 속에서만 보던 장면이 눈앞에 있었다.

해가 지고 백사장에 촛불이 켜진 레스토랑 테이블
해가 지고 백사장에 촛불이 켜진 레스토랑 테이블

식당 뒤편 주방 쪽으로 돌아가니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시멘트 바닥에 서서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이 숙소 근처엔 고양이가 여러 마리 살았고, 사흘을 눌러앉는 동안 매일 마주쳤다.

숙소 주방 근처 시멘트 바닥에 서 있는 새끼 고양이
주방 근처에서 마주친 새끼 고양이

저녁을 먹고 나서는 블랙라이트 조명을 켠 바에 들어갔다. 말레이시아를 다닐 때도 그랬듯, 이 여행 내내 나는 술자리에서도 늘 음료 쪽을 시키는 사람이었다. 다들 칵테일이나 맥주를 시키는 분위기였다. 나는 콜라 한 잔을 시켰다. 술을 안 마시니까. 보랏빛 조명 아래서 유난히 하얗게 빛나던 콜라병이 그날 저녁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았다.

블랙라이트 조명 아래서 유난히 하얗게 빛나던 콜라병
블랙라이트 조명 아래서 유난히 하얗게 빛나던 콜라병

콜롬보→미리사 해안기차 예약법

콜롬보 포트역에서 미리사까지는 남부 해안선을 따라 하루 몇 편씩 기차가 다닌다. 평균 소요시간은 3시간 45분 안팎이고, 빠른 편은 3시간 20분대에도 닿는다. 스리랑카 기차표는 출발 30일 전부터 예매가 열린다. 인기 구간이라 좌석이 금방 차니 8일 전쯤에는 잡아두는 게 안전하다. 지정석 없이 완행으로 타면 그만큼 싸다. 다만 장거리 구간에서는 서서 가는 시간이 길어진다.

미리사 숙소 시세

2026년 기준 미리사 도미토리는 보통 1박 3~12달러대, 평균으로 보면 4달러 안팎이다. 개인실은 25~30달러대가 흔하고, 성수기나 해변 바로 앞 숙소는 이보다 더 올라간다. 2015년 당시엔 표지판 앞에서 직접 발품을 팔아 방을 골랐다. 요즘은 부킹닷컴이나 호스텔월드에서 후기와 사진을 먼저 보고 예약하는 쪽이 실패가 적다.

다녀와서

해안기차 하나가 하루의 인상을 통째로 바꿔놨다. 회색빛 바다, 열린 문, 눈빛이 반짝이던 학생. 그리고 열네 개 표지판 중 어디에도 없던 숙소를 고른 것도, 지나고 보면 그 나름대로 괜찮은 선택이었다. 완벽하게 갖춰진 곳보다, 부족해도 웃으며 맞아주는 곳이 오래 남는다는 걸 이날 배웠다.

다음 편은 이 숙소에서 사흘을 눌러앉게 되는 이야기다. 틈만 나면 정전되던 밤들, 해변에서 낯선 이가 건넨 맥주를 거절한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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