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팬 모임에 따라간 밤, 바나나잎밥부터 로티 티슈까지
숙소 근처 알로 스트리트(Jalan Alor)는 저녁이 되자 완전히 다른 골목이 됐다. 낮엔 그냥 좁은 도로였는데, 해가 지자 나무마다 홍등이 줄줄이 내걸리고 빨간 플라스틱 의자가 도로까지 밀고 나왔다. 생선 튀기는 냄새와 광둥어 간판 사이로 사람들이 혼잡하게 지나다녔다. 이날 밤 나는 이 골목에서 시작해서, 전혀 계획에 없던 자리까지 따라가게 됐다.



*홍등과 빨간 의자로 북적이는 알로 스트리트의 저녁*
*홍등과 빨간 의자가 늘어선 알로 스트리트 거리*
실용정보만 급하면 여기서 바로 내려가면 된다 — 카유 나시칸다르 SS2점 → · 바나나잎 라이스 먹는 법 → · 로티 티슈가 뭔지 →. 우선은 그날 밤 이야기부터.
쿠알라룸푸르에서 묵은 숙소 Alor Bunker Home(현재는 폐업)은 돌바닥이 시원한 곳이었다. 낮에 너무 더워서 로비 쪽에서 쉬고 있는데 옆자리에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앉았다. "한국인이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해외 숙소에서 한국말이 들리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알고 보니 영상을 찍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물이 꽤 잘생긴 친구였다. 본인 말로는 올린 영상 하나가 우연히 터지면서 동남아 쪽에서 인기가 붙었다고 했다. 실제로 몇 개를 보여줬는데 좋아요 수가 심상치 않았다. 노려서 만든 인기가 아니라 어쩌다 얻은 인기라는 식으로 담담하게 말하던 게 기억난다. 그날 하루를 같이 보낸 게 전부라 그 뒤로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이 밤을 통째로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그날 저녁, 그 친구가 물었다. "팬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갈래?"
현지 팬이라는 사람들이 마중 나왔다.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 셋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영상을 보다가 그 친구를 알게 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손에는 선물까지 들려 있었다. 나는 그냥 옆에 있다가 따라나선 사람인데도 똑같이 챙겨줘서 시작부터 좀 얼떨떨했다.
이름도 제대로 못 외운 채로 인사를 나누자마자 차에 올랐다. 걸어서 갈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숙소가 있는 알로 스트리트에서 목적지까지는 차로 25분, 대중교통으로 다니기엔 애매한 거리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의 차 뒷좌석에 앉아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지나는 동안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다. 창밖으로 간판 불빛이 스쳐 지나가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 어색함이 오래가지 않았다. 몇 마디 나누고 같이 다니다 보니 이 친구들이 진심으로 우리를 반가워하고 있다는 게 그냥 느껴졌다. 그때부터는 낯을 가릴 이유가 없어서 그냥 신나게 놀았다. 이 여행이 내 계획대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그게 나쁜 일이 아니라는 걸 처음 실감한 밤이었다.
손으로 먹는 바나나잎 라이스, 처음이었다
차가 도착한 곳은 야외 좌석의 인도식 식당이었다. 파란 원형 테이블에 앉자 종업원이 초록빛 바나나잎을 펼쳐 깔았다. 그 위로 밥이 산처럼 쌓이고, 커리 몇 종류와 튀긴 생선 한 토막이 놓였다. 포크도 숟가락도 없었다. 손 씻는 곳에서 손을 씻고 오라는 말에, 그제야 손으로 먹는 자리라는 걸 알았다.
사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위생이었다. 종일 밖을 돌아다닌 손으로 밥을 집는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식당 한쪽에 손 씻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이런 식으로 먹는 게 기본인 곳이니 당연히 갖춰져 있는 거였다. 거기서 손을 박박 씻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바나나잎 위에 차려진 한 상*
*바나나잎에 밥과 커리가 올라가고 옆엔 마마크 밀크티 한 잔*
살면서 손으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 손가락 쓰는 법을 하나하나 잘 알려줬는데도 처음 몇 입은 영 마음대로 안 됐다. 제일 힘든 건 뜨거운 거였다. 갓 나온 밥과 커리를 맨손으로 집으니 손끝이 데일 것 같아서 이리저리 흔들며 쩔쩔맸고, 그러다 자꾸 흘렸다. 그 모습에 다들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래도 먹다 보니 금방 적응이 됐다. 손끝으로 밥과 커리를 뭉쳐 입에 넣는 감각이 익숙해지자 오히려 재밌어졌다. 매콤한 커리와 튀긴 생선이 손끝에서 뒤섞이는 그 맛은 포크로 먹었으면 몰랐을 맛이었다. 여행 중에 한 체험 중에서도 손에 꼽게 즐거웠던 시간이다. 이런 식당에 데려와줘서 너무 고마웠다.
계산도 팬들이 다 했다. 손사래를 쳐봤지만 당연하다는 듯 자기들이 냈다. 그때 나는 하루 예산을 쪼개가며 다니던 배낭여행자라 이 한 끼가 정말 컸다. 처음 본 외국인한테 밥을 사주고 선물까지 안기는 마음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날은 그냥 고맙다는 말밖에 못 했다.

나를 보여주려고 데려온 걸까, 로티 티슈 퍼포먼스
저녁을 먹고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Original Penang Kayu Nasi Kandar SS2점이었다. 대리석 원형 테이블에 나무 의자, 천장엔 선풍기가 돌아가는 넓은 마마크 식당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들 휴대폰을 꺼내 서로 사진첩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한국말은 거의 안 통했지만 그런 건 별 문제가 안 됐다. 말이 안 통해도 웃음으로 채워지는 시간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디저트로 로티 티슈가 나왔다. 종업원이 사람 키만 한 얇은 반죽을 천장 쪽으로 들어 올려 원뿔 모양으로 세워 내왔다. 다 같이 둘러서서 브이를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이 자리에 우리를 데려온 이유의 절반은 이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실제로 우리 둘 다 그 앞에서 감탄했으니 성공한 셈이다.
얇은 로티를 손으로 뜯어 나눠 먹었는데, 바삭하고 달았다. 과자에 가까운 식감인데 크기는 사람 키만 하니 먹는 내내 웃음이 났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이 원뿔이 테이블에 세워지던 장면이 그대로 떠오른다. 말레이시아에 간다면 이것만큼은 꼭 한 번 시켜보라고 권하고 싶다.


식당을 나와 숙소로 돌아오니 밤이 깊어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새콤한 티 한 잔
로비를 지나는데 자전거 한 대가 벽에 걸려 있고, 방문 앞엔 나무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 공용 공간에서 함자를 만났다. 팬 모임과는 별개로, 같은 숙소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는 이제 기억이 안 난다. 이름과 웃던 얼굴만 남았다. 유머러스한 성격이라 같이 있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함자가 노란 음료를 한 잔 건넸다. 마셔보니 굉장히 시었다. 표정을 찌푸리자 함자가 더 크게 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패션프루트 과육을 통째로 우려낸 차였다. 재밌는 건 함자도 그게 시다는 걸 알면서 자기도 계속 마시고 있었다는 거다. 신맛에 얼굴을 찡그렸다가 또 웃고, 그러면서 한 잔을 다 비웠다. 그 새콤한 맛을 앞에 두고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잠도 안 자고 그대로 버스를 타러 나갈 시간이었다. 자고 나가도 됐는데 안 잤다. 이야기가 재밌으니까 그냥 계속 앉아 있었고, 그러다 아침이 됐을 뿐이다. 계획을 세워두고 그대로 지키는 여행이 아니라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여행. 요즘 말로 하면 이 밤에 P의 여행이 시작된 셈이다. 그리고 이 습관은 남은 여정 내내 이어졌다.

그날 만난 팬들 중 몇 명은 지금도 인스타그램 친구로 남아 있다. 한국 문화를 좋아해서 여전히 한국에 여행을 오는 친구들이다. 피드에 서울 사진이 올라오는 걸 볼 때마다 그날 밤 바나나잎 앞에서 웃던 얼굴이 겹친다.
낯선 사람 차를 얻어 타고, 손으로 밥을 먹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로티 하나를 나눠 먹은 밤이었다. 계획에 하나도 없던 하루였는데, 돌아보면 이 밤이 이 여행에서 제일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여행이 재밌어지는 순간은 계획해둔 곳이 아니라, 누군가 손을 내밀어준 자리에서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카유 나시칸다르 SS2점
Original Penang Kayu Nasi Kandar는 1974년 SS2의 커피숍 노점에서 시작해 지금은 클랑밸리와 페낭 곳곳에 지점을 낸 나시칸다르 전문점이다. 그날 밤 갔던 곳이 바로 1호점, SS2 본점(No. 64, Jalan SS2/10, 47300 Petaling Jaya)이다. 24시간 영업이라 밤 9시에 갔는데도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로티 티슈는 여기서도 이름난 메뉴라, 밥을 다 먹고도 디저트로 따로 주문하는 사람이 많다.
바나나잎 라이스 먹는 법
바나나잎 라이스는 손을 씻고 오른손으로 먹는 게 기본이다. 손가락 끝으로만 밥과 커리를 섞고, 손바닥까지 음식이 닿지 않게 하는 게 예의라고 한다. 손으로 먹기 부담스러우면 포크와 숟가락을 요청해도 무례가 아니다. 다 먹은 뒤엔 바나나잎을 몸 쪽으로 접으면 잘 먹었다는 뜻이고, 반대로 접으면 입에 안 맞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날 저녁 나는 잎을 몸 쪽으로 접었다.
로티 티슈가 뭔지
로티 티슈는 로티 카나이 반죽을 종이처럼 얇게 늘려 굽는 디저트다. 얇기가 티슈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고, 크게 부풀려 세우는 모양 때문에 '로티 헬리콥터'라는 별명도 있다. 설탕이나 카야잼을 뿌리거나 아이스크림을 올려 먹기도 하는데, 그날은 반죽 그대로 뜯어 먹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살짝 쫀득했다.
다녀와서
그날 밤 이후로 이 여행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 바뀌었다. 계획해둔 관광지보다, 누가 옆에서 손을 내밀어준 순간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알았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비슷한 우연이 이어졌다. 지금 돌아봐도 이날 밤이 그 시작이었다.
다음 편은 KL을 떠나 페낭으로 넘어가는 날이다. 안내소 직원이 손수 써준 메모 한 장과, 그때만 해도 낯설었던 리클라이너 고속버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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