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도미토리에서 하루 만에 사귄 국적 다섯 친구들

로마 도미토리에서는 사람이 하루 단위로 사라진다. 어제 같이 웃던 룸메이트가 다음 날 아침엔 짐을 싸고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빈자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 자리엔 곧 다른 나라 얼굴이 앉는다.

실전 정보만 급하면 여기서 바로 내려가면 된다 — 로마 저녁 산책과 젤라또 →. 우선은 도미토리 룸메이트가 다섯 번쯤 바뀌던 그 며칠 이야기부터.

로마는 소피아 다음으로 밟은 유럽 도시였다. 도착한 첫날, 함께 지내던 도미토리 친구들이 하나둘 체크아웃했다. 남은 건 낯선 도시와 나 혼자였는데, 그마저도 심심할 틈이 없었다.

이태원인 줄 알았다

숙소 골목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렸다. 로마에 한국인 관광객이 워낙 많다 보니, 잠깐은 이태원에 온 줄 알았다. 다만 말은 다 들리는데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그날부터는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 핑계가 자연스레 생겼다.

숙소 가는 골목
숙소 가는 골목 — 저녁 볕이 낮게 든 로마 뒷길

콜로세움과 판테온을 혼자 걸어서 둘러봤다. 사람 구경만으로도 시간이 잘 갔지만, 아침부터 계속 걸었더니 점심때쯤엔 배가 많이 고팠다.

배고픔이 이긴 합석

배고픔 앞에서는 혼자 여행 중이라는 사실도 깜박했다. 레스토랑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더니, 안에는 한국인 남학생 넷이 막 주문을 하려던 참이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라는 말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올 줄은 몰랐다.

한국 남학생들과 합석한 점심
한국 남학생 넷과 합석 — 갓 나온 화덕 피자를 나눠 먹었다(판테온 근처 점심)

지금 생각하면 꽤 뻔뻔한 부탁이었는데, 넷은 흔쾌히 자리를 내줬다. 덕분에 값비싼 피자와 파스타를 나눠 먹었고, 콜라와 환타 캔이 오가는 사이 금세 편해졌다. 그 넷은 그날 밤 비행기로 떠났다. 숙소로 돌아오니 방은 다시 비어 있었지만, 그새 익숙해져서인지 이번엔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Diamond B&B, 공짜 저녁의 정체

빈자리는 이번에도 오래가지 않았다. 룸메이트 월레스와 새로 들어온 친구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내가 묵던 호스텔은 저녁을 무료로 제공했는데, 주방에 미리 자리를 잡아두면 다 같이 둘러앉아 먹는 방식이었다.

룸메이트 월레스와 도미토리에서
룸메이트 월레스와 — 이층 침대 아래에서 찍은 셀카

멕시코, 캐나다, 미국에서 온 친구들이 주방에 모였고, 동양인은 이번에도 나 혼자였다. 그날 저녁 메뉴가 지금도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다.

퉁퉁 불은 파스타에 토마토소스를 얹은 메뉴였는데, 맛은 딱 떡볶이였다.

좋은 레스토랑도 아니었는데, 그 메뉴 하나로 낯선 사람들과 순식간에 친해졌다. 밥 한 끼를 나눠 먹는 것만으로 국적 차이가 무색해진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휠체어를 탄 친구와 떠난 첫 바 투어

숙소 방을 옮겨야 해서 처음엔 저녁 바 투어를 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옆방 멕시코 친구가 내일 새벽 5시 비행기라며 짧게 한잔하자고 말을 걸어왔다. 못 이기는 척 나가기로 했다.

거기에 두 사람이 더 붙었다. 나와 같은 방을 쓰던, 휠체어를 탄 친구와 매너 좋은 벨라루스 친구였다. 이 여행에서 휠체어를 탄 친구와 어울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멕시코, 벨라루스, 휠체어 탄 친구, 그리고 나. 국적도 사정도 다른 넷이서 콜라모히토 한 잔씩을 들고 바를 돌았다.

말이 다 통하지도 않았고 술이 세지도 않았는데, 그 밤이 이 여행에서 손에 꼽히게 즐거웠다.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넷이 모여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던 것 같다.

그 뒤로도 계속 새 얼굴이었다

로마에서 며칠을 더 지내는 동안 얼굴은 계속 바뀌었다. 어느 날은 로마에서 만난 친구들, 다른 민박에서 온 친구들과 공원에서 사진을 남겼다.

그날 만난 친구들과 공원에서
그날 만난 친구들 — 로마 시내 공원에서

혼자 남겨지는 순간이 매번 있었지만, 그 자리엔 늘 누군가 다시 앉았다. 로마에서 배운 건 하나였다. 도미토리는 사람이 빠지는 만큼 빠르게 채워진다는 것, 그리고 먼저 다가가야 그 자리가 채워진다는 것이었다. 로마에서는 매번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했고, 그게 오히려 여행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로마 저녁 산책과 젤라또

그날처럼 지금도 로마의 저녁은 사람과 음식으로 채워진다. 콜로세움과 바티칸 같은 낮 코스를 마쳤다면, 저녁엔 트라스테베레 쪽으로 넘어가는 걸 권한다. 테베레강 서쪽 강변에 자리한 이 동네는 해 지고 나면 로마에서 밤 문화가 제일 활발한 곳으로 바뀐다. 저녁 6시에서 8시 사이엔 아페리티보 문화도 즐길 만하다. 아페롤 스프리츠나 하우스 와인 한 잔을 시키면 핑거푸드나 간단한 안주를 같이 내주는 식당이 많아서, 식사비 부담을 줄이면서 분위기까지 챙길 수 있다. 현지인들의 본격적인 저녁 식사 시간인 8시 반보다 조금 이른 7시쯤 가면 자리 잡기가 수월하다.

저녁을 먹은 뒤엔 테베레강을 따라 걸어 나오는 코스가 괜찮다. 걷다가 출출해지면 젤라또를 챙기면 되는데, 판테온 근처 지올리띠가 로마 3대 젤라또 집 중 하나로 꼽히고 레몬·수박 같은 과일 맛이 특히 좋다. 트레비 분수 근처의 작은 가게들도 밤늦게까지 줄이 이어지는 곳이 꽤 있다.

다녀와서

그 며칠은 정작 유명한 유적보다 도미토리에서 스친 얼굴들이 더 오래 남았다. 국적도 사정도 다른 사람들과 밥 한 끼, 술 한 잔을 나누는 것만으로 하루가 꽉 채워졌다. 다시 로마에 간다면, 이번에도 도미토리에 묵으면서 그날처럼 낯선 사람 옆에 슬쩍 자리를 잡아보고 싶다.

다음 편은 그 친구들과 함께 간 바티칸이다. 미드로 영어를 익혔다고 믿었는데, 현장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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