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테온에서 트레비까지, 젤라또 두 번으로 버틴 로마의 오후

한여름 로마를 걸어서 도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젤라또를 먹고, 조금 걷고, 다시 젤라또를 먹는 것.

바쁘면 실전 정보부터 — 판테온 입장 → · 트레비 분수 2유로 규정 → · 스페인 계단에 앉으면 벌금 →. 우선은 그날 오후 동선부터.

천장에 구멍이 뚫린 건물

판테온 오큘루스에서 쏟아지는 빛 아래 남긴 셀카

포로 로마노에서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니 골목이 좁아졌다. 그러다 갑자기 기둥이 늘어선 정면이 나왔다. 판테온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시선이 자동으로 위로 간다. 지름 구 미터짜리 구멍으로 빛이 기둥처럼 떨어졌다. 오큘루스라고 부르는 그 구멍에는 유리도 덮개도 없다. 비가 오면 그대로 들어오고, 바닥에 난 배수구로 빠진다.

격자무늬 돔 한가운데 뚫린 판테온의 오큘루스
판테온 오큘루스 — 유리도 덮개도 없다

돔 안쪽은 사각 격자로 파여 있는데, 위로 갈수록 격자가 작아진다. 실제보다 더 높아 보이게 만든 장치라고 한다. 콘크리트로 만든 돔 중에는 아직도 세계에서 제일 크다.

지금은 성당으로 쓰인다. 안쪽 벽감에는 제단이 있고,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의 무덤도 여기 있다. 이천 년 된 신전이 성당이 되어 살아남았다는 게, 로마에서 오래된 것들이 버티는 방식을 보여준다.

판테온 내부의 제단과 벽감

밖으로 나오니 광장이 사람으로 가득했다. 분수 앞에 앉아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로 겨우 빠져나왔다.

판테온 앞 광장을 채운 사람들

낯선 테이블에 끼어 앉아 먹은 점심

네 구역으로 나뉜 피자 한 판
네 구역으로 나뉜 피자 한 판을 다섯이 나눴다

배가 고파서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그 안에서 한국인 남학생 넷과 합석하게 됐는데, 그 사연은 다음 편에 따로 적었다.

피자 한 판과 파스타 두 접시를 다섯이 나눴다. 피자는 네 구역으로 나뉜 종류였고, 구역마다 토핑이 달라서 한 판으로 네 가지 맛을 봤다. 붉은 식탁보 위에 환타와 콜라 캔이 굴러다녔다.

붉은 식탁보 위에 놓인 피자 접시와 와인잔

한 끼 값이 만 원을 훌쩍 넘었다. 소피아에서 조각피자 하나로 배를 채우던 게 이틀 전이라 격차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다섯이 나눠 내니 부담이 줄었다. 여행에서 사람을 만나면 밥값이 싸진다는 걸 이날 배웠다.

밥을 먹고 나와 판테온 앞을 한 번 더 지났다. 낮과 저녁의 판테온이 얼마나 다른지는 그날 밤에야 알았다.

판테온 정면 기둥을 배경으로 남긴 셀카

첫 번째 젤라또

대리석 기둥과 샹들리에가 있는 고전적인 젤라테리아 내부

판테온에서 몇 골목 안 가서 젤라또 가게에 들어갔다. 로마 3대 젤라또 집이라며 추천받은 곳이었다.

가게 안이 젤라또 가게답지 않았다. 대리석 기둥에 샹들리에가 걸려 있고, 종업원들이 흰 재킷에 검은 조끼를 입고 있었다. 벽에는 "이 구역에서는 앉을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가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붙어 있었다. 서서 먹는 값과 앉아서 먹는 값이 다른 게 이 나라 방식이다.

유리 진열대 앞에서 한참 고민했다. 요구르트, 리몬첼로, 쌀, 코코넛. 처음 보는 이름이 절반이었다.

요구르트·리몬첼로·쌀·코코넛 이름표가 붙은 젤라또 진열대
요구르트·리몬첼로·쌀·코코넛. 처음 보는 이름이 절반이었다

결국 쌀 맛을 골랐다. 이 집의 간판 맛이라고 해서 시켰는데, 정말 밥알이 씹혔다. 우유 푸딩에 쌀알을 넣은 것 같은 맛이었고,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손에 든 젤라또 콘

계단에 앉아도 되던 시절의 스페인 광장

스페인 광장의 낡은 배 모양 분수
바르카차 분수 — 수압이 낮아 가라앉는 배 모양으로 만들었다

젤라또를 물고 북쪽으로 걸었다. 명품 매장이 늘어선 콘도티 거리를 지나니 광장이 나왔다.

명품 매장이 늘어선 콘도티 거리

계단 아래에는 낡은 배 모양의 분수가 있었다. 물이 가라앉는 배처럼 만들어놨는데, 이 일대는 수압이 낮아서 물을 높이 뿜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약을 디자인으로 바꿔놓은 셈이다.

계단에는 사람들이 층층이 앉아 있었다. 나도 그 틈에 앉아 젤라또를 마저 먹었다. 지금은 이게 불가능하다. 몇 년 뒤부터 계단에 앉는 것 자체가 금지됐고, 적발되면 벌금이 나온다. 그 시절 사진을 다시 보니 새삼스럽다.

사람들이 층층이 앉아 있는 스페인 계단
앉아도 되던 시절의 스페인 계단

계단 위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구도가 좋았다. 위로 올라가면 아래 광장과 콘도티 거리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스페인 광장과 콘도티 방향

광장에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포폴로 광장에서 남긴 셀카

거기서 좀 더 걸어 포폴로 광장까지 갔다. 한가운데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서 있고 양옆에 쌍둥이 성당이 마주 보는, 로마에서 제일 잘 정돈된 광장이다.

오벨리스크가 선 포폴로 광장 전경

광장 북쪽 끝의 계단을 오르면 핀초 언덕이다. 오르막이 길지 않은데 올라가서 보이는 게 확 다르다. 방금 지나온 광장이 통째로 발밑에 들어오고, 오벨리스크가 정중앙에 놓인다.

핀초 언덕에서 내려다본 포폴로 광장
핀초 언덕에서 내려다본 포폴로 광장

로마에 높은 건물이 없다는 걸 여기서 알았다. 지평선까지 지붕이 낮게 깔려 있고, 그 위로 튀어나온 건 돔뿐이었다.

핀초 언덕에서 바라본 로마 시내의 낮은 지붕들

나무 사이로 저 멀리 둥근 돔 하나가 보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었다. 그때는 이름도 잘 몰랐는데, 다음 날 그 안에 서 있게 됐다.

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물이 없는 트레비 분수를 봤다

복원 공사용 구조물이 세워진 트레비 분수
복원 공사 중이던 트레비 분수 — 물을 뺀 상태였다

핀초에서 내려와 다시 남쪽으로 걸었다. 트레비 분수는 골목 끝에서 갑자기 나온다.

좁은 길을 걷다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시야가 확 열리면서 흰 조각 덩어리가 벽을 가득 채웠다. 건물 정면 전체가 분수다. 광장이 좁아서 뒤로 물러날 자리가 없고, 그래서 더 커 보인다.

그런데 물이 없었다. 수반이 텅 비어 있었고, 조각 앞으로 임시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복원 공사 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해에 대대적인 세척과 보수가 진행 중이었고, 물을 뺀 채로 일 년 넘게 작업이 이어졌다. 관광객을 막지는 않았고, 대신 수반 위로 투명한 임시 통로를 놓아서 조각 바로 앞까지 걸어갈 수 있게 해뒀다.

사람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물이 없으니 조각의 발밑까지 다 보였다. 평소라면 물에 잠겨 있을 바위 조각과 배수구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이게 어떻게 만들어진 물건인지가 오히려 잘 보였다.

공사 중인 트레비 분수 앞에서 남긴 셀카

동전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던질 물이 없었으니까. 다들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는데, 나는 물 없는 트레비를 본 게 지금은 오히려 좋다. 그 몇 달 사이에 여기 있었던 사람만 본 얼굴이다.

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한 건 그해 늦가을이었다.

하루의 끝은 다시 젤라또

한낮의 비토리아노 기념관 정면

트레비에서 베네치아 광장 쪽으로 내려갔다. 넓은 광장 저편으로 나선형 부조가 감긴 기둥이 하나 서 있었다. 트라야누스 기둥이다. 이천 년 전에 만든 전쟁 기록화가 기둥을 스물세 바퀴 감고 올라간다.

그 앞에 흰 대리석 건물이 있었다. 비토리아노다. 흰 대리석이 햇빛을 그대로 반사해서 눈이 부셨다. 로마 사람들은 이 건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날 낮에는 그냥 눈부시게 하얗다는 인상뿐이었다.

트라야누스 기둥이 보이는 베네치아 광장 전경

두 번째 젤라또는 컵으로 시켰다. 휘핑크림을 얹어주는 집이었다. 아침 여섯 시 오십 분에 나와서 오후 세 시 반까지 걸었고, 그 사이 먹은 게 점심 한 끼와 젤라또 두 개였다.

휘핑크림이 얹힌 컵 젤라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다리가 뻐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판테온 입장

한동안 무료였지만 지금은 유료다. 2026년 7월 1일부터 7유로로 올랐다(그 전에는 5유로였다).

  • 개방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 마지막 입장은 6시 45분.
  • 미사가 있는 시간에는 관람이 제한된다.
  • 온라인 예약이 가능하고, 예약하면 줄을 덜 선다. 현장 발권도 되지만 성수기 낮에는 줄이 길다.
  • 광장에서 정면을 보는 건 여전히 무료다. 기둥 아래까지는 들어갈 수 있다.

비 오는 날 오큘루스 아래에 서면 빗줄기가 그대로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다. 날씨가 궂다고 판테온을 미룰 이유는 없다.

트레비 분수 2유로 규정

2026년 2월 2일부터 분수 바로 앞 관람 구역이 유료로 바뀌었다. 2유로다.

  • 유료 구역 운영은 매일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 그 시간 외에는 접근이 자유롭다. 이른 아침이나 밤 10시 이후가 사람도 적고 값도 안 든다.
  • 2025년부터 이미 인원 제한이 있었다. 분수 앞 공간에 동시에 400명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줄을 세운다.
  • 조금 떨어진 계단 쪽에서는 여전히 무료로 볼 수 있다. 전체 구도를 담으려면 오히려 뒤쪽이 낫다.

동전을 던지려면 유료 구역에 들어가야 한다.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 너머로 던지는 게 규칙이고, 한 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온다는 얘기가 붙어 있다.

스페인 계단에 앉으면 벌금

2019년부터 계단에 앉는 것 자체가 금지됐다.

  • 벌금은 250유로. 계단을 더럽히거나 손상시키면 400유로까지 올라간다.
  • 낮에는 형광 조끼를 입은 단속 인원이 호루라기를 불며 돌아다닌다. 몰라서 앉았다가 바로 일으켜 세워지는 경우가 흔하다.
  • 음식물을 들고 계단에 오르는 것도 제지 대상이다. 젤라또를 손에 들었다면 광장 쪽에서 먹고 올라가는 편이 안전하다.

계단 위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 앞 테라스에서는 서서 내려다볼 수 있다. 앉지만 않으면 오르내리는 건 문제없다.

다녀와서

이날 하루에 걸은 거리를 나중에 지도로 재보고 놀랐다. 아침의 성당들부터 트레비까지 계속 걸어서 이었다.

로마의 좋은 점은 걷는 사이사이에 유적이 계속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목적지 사이의 이동이 지루하지 않다. 다음에 온다면 이번엔 하루를 더 늘려서, 오늘 스쳐 지나간 골목들을 천천히 다시 걷고 싶다.

다음 편은 그날 저녁이다. 숙소에 돌아와 만난 사람들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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