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미리사 해변, 정전이 되면 촛불을 켜고 놀았던 사흘
미리사(Mirissa)에서는 이상하게 시간 감각이 뭉개졌다. 해가 뜨면 바다에 나갔다가 해가 지면 노점 불빛 아래를 걸었고, 그 사이 며칠이 흘렀는지는 나중에야 셌다. 도착한 첫날 짐을 푼 곳은 신축 중이던 도미토리 HI 행오버 호스텔이었다. 이탈리아인 매니저와 여자 매니저 둘이 운영하는 곳으로, 둘 다 야망 있고 친절했다.
실전 정보부터 급하면 여기서 바로 내려가도 된다 — 미리사 고래관찰 → · 콜롬보에서 미리사 가는 기차 →. 나는 우선 그 사흘 이야기부터 하고 싶다.
낮에는 거의 바다에서 살았다. 숙소에서 몇 발짝만 걸으면 패럿록(Parrot Rock)이라는 작은 바위섬이 파도 너머로 보였는데, 썰물 때만 걸어서 건널 수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원장에는 "두 번째 해변은 파도가 낮았다"고 적어놨는데, 정확히 그게 어느 지점이었는지는 지금도 가물가물하다. 패럿록 쪽 파도는 하얗게 부서질 만큼 셌으니, 아마 그 반대편 어딘가 잔잔한 만이었을 것이다. 기억이 다 안 남았다고 굳이 지어내진 않으려 한다.
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코코넛 노점에 불이 켜졌다. 화덕 앞에서 아저씨가 마체테로 왕코코넛 껍질을 순식간에 쳐냈다. 빨대를 꽂아 건네받은 코코넛은 미지근하고 달았다. 낮 동안의 열기를 그렇게 식히는 게 하루의 마무리 같은 의식이 됐다.

원래는 하루만 자고 뜰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여행에서 계획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에어컨 좋다는 후기를 보고 고른 숙소였는데, 정작 전기가 제일 안 좋았다. 숙소는 틈만 나면 정전이 됐다. 그럴 때마다 다들 나와서 촛불을 켜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밑을 오가고, 여러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과 나까지 마당에 둘러앉았다. 정작 불만은 손님들보다 주인들 쪽이 더 컸다. 촛불 아래서 노는 게 오히려 재밌었던 우리와 달리, 주인들은 정전이 반복될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며 미안해했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이 술을 권하면 못 이기는 척 한 잔 받기도 한다. 나는 그냥 안 마신다고 했다. 그 사흘 중 어느 저녁, 해변에서 금발머리 여자가 다가와 맥주 한 잔 하자고 물었다. 술을 안 마신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더니 상대가 좀 당황한 얼굴이 됐다. 예상 못 한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그 대신 나는 블랙라이트 조명이 켜진 바에 들어가 앉아 콜라 한 잔을 시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행지에서 다들 술을 시킬 때 혼자 콜라나 홍차를 시키는 버릇이 그대로 남았다.
저녁이면 해변 좌판에 생선과 새우, 게가 색깔별로 진열됐다. 골라서 그 자리에서 구워 먹는 방식이었는데, 낮에 실컷 헤엄친 몸으로 그 앞을 서성이며 뭘 고를지 고민하는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사흘 내내 그런 식으로 하루가 뭉개졌다. 오래 있어야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게 나중에 날짜를 하루 착각하게 만든 이유였다는 건 그때는 몰랐다.
미리사 고래관찰
미리사 이름을 검색하면 백사장보다 고래 사진이 먼저 나온다. 11월부터 4월까지가 성수기로, 이 기간엔 대왕고래·향고래·브라이드고래에 돌고래까지 볼 확률이 90%를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대부분 투어는 미리사 항구에서 오전 7시에 출항해 3시간 반에서 4시간가량 바다에 떠 있고, 출항 30분 전 도착이 기본이다. 가격은 1인 50~80달러가 표준이고 성수기엔 더 오르는 편이라 2~3일 전 예약이 안전하다. 나는 사흘 내내 헤엄만 치느라 고래는 못 봤는데, 다시 온다면 이건 꼭 채워보고 싶은 목록이다.
콜롬보에서 미리사 가는 기차
콜롬보 포트역에서 미리사 방향(웰리가마역 하차)으로 가는 기차는 평균 3시간 45분, 가장 빠른 편은 3시간 22분이 걸린다. 오전 6:50·8:30·10:30 열차는 예약이 안 되고 당일 역에서만 표를 살 수 있는데, 지정석 에어컨 객차를 미리 잡고 싶다면 14:40이나 15:50 오후 열차를 고르면 된다. 정확한 시각표와 요금은 스리랑카 철도청 공식 사이트와 공식 요금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갈레(Galle)에서 출발한다면 버스터미널에서 350번이나 2번 버스를 타면 1~1.5시간, 요금은 100~200루피 수준이고, 툭툭을 잡으면 한 시간 만에 3천 루피 안팎으로 도착한다.
미리사 기본 정보
환율은 시기마다 다르지만 최근 기준 1달러가 약 336루피, 원화로는 약 1,488원 선이다. 환산하면 1루피가 4~5원 정도라, 200루피짜리 볶음밥 한 그릇이 900~1,000원 선으로 여전히 저렴하다. 마을 안은 걸어서도 뚝뚝으로도 다 닿는 거리라 이동이 어렵지 않다. 해변 남쪽 끝 패럿록은 썰물 때만 건널 수 있고, 마을에서 15분쯤 걸어 올라가는 코코넛트리힐(Coconut Tree Hill)에 서면 야자수와 바다가 한 프레임에 담긴다. 둘 다 무료이고 하루 중 아무 때나 갈 수 있다.
다녀와서
하루만 자고 떠나려던 계획을 깬 게 이 여행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였다. 정전이 될 때마다 촛불을 켜고 낯선 사람들과 마당에 둘러앉던 그 시간이, 지나고 보니 미리사를 가장 오래 붙잡아둔 이유였다. 다음에 온다면 이번엔 새벽 배를 타고 나가 고래가 물 위로 올라오는 순간까지 보고 싶다.
다음 편은 미리사에서 다시 이동한 갈레 요새마을과, 거기서 만난 동행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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